산문

금성의 밤

완자완자 2022. 10. 24. 16:10

지구에서 편지가 도착했다. 121일인 밤동안 무얼하며 지내냐고.

금성의 자전주기는 약 243일이라 지구의 시간 기준으로는 금성의 하루의 평균치는 243.0226±0.0013일이 된다. 낮과 밤이 각각 121일 하고도 12시간인 것이다. 친구가 자기가 금성에 있다면 잠을 밤에 전부 몰아서 잘 것이라고 했다. 네 달간 자고 네 달간 움직이고. 하루가 243일이라는 걸 곰곰히 떠올려보면 막연해서 오히려 두려울지도 모른다고.

우선 생각보다 121일 동안 어두컴컴한 밤이더라도 우리의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다. 금성의 대기를 관측하고, 오늘의 위치 좌표는 어디인지, 우주선 정비와 남은 음식들 점검, 보고, 그리고 편지 읽기. 그러나 나는 금성에서 딱 사흘을 지내는 것인데도 지구로 돌아가면 순식간의 시간이 흘러있을 것이었다. 내일이면 지구로 돌아가는 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.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 데. 강산이 바뀌는 시간의 약 1/4정도가 흐르면 어떤 게 바뀌어 있을지 궁금하다. 금성의 하루인 243일은 너무나 긴 시간이라서 만약 지구도 동일한 시간이 흘러간다면 하루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. 하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들을 잃을 수도 있다. 약 8달의 시간은 누군가에게 충분히 죽음이 다가올만한 시간이고, 새 생명이 탄생할 만한 시간이다. 어제는 정말 예전의 일이 되어버릴 것이고,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. 

친구는 금성에서는 내일 또 보자라는 말이 지구에서 나중에 밥 한끼나 하자라는 말과 비슷하게 사용되냐고 물었다. 우선 여기 우주선에 살고 있는 나, 킴벌리, 카린, 존, 아주아는 매일같이 보고 있으니 내일 또 보자라기 보다는 이따 보자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. (여기에는 존 말고 백인이 없는데도 나, 킴벌리, 카린은 우스갯 소리로 kkk단이라고 불리고는 했다.) 어쩌면 금성의 시간이 지구에 적용 됐을 때 내일 보자라는 말을 남발할 것 같기도 하다. 진짜 미안한데, 내일까지 할게라는 말이 통하지도 않겠지. 그러나 애정을 담은 인사말이 될지도 모른다. 우리 죽지 말고 아프지 말고 1년 뒤에도 또 보자, 바로 내일이지만. 하하.

여긴 매일 함께하는 사람들 뿐이라, 만약 지구가 금성이 된다면 그럴지도. 금성의 시간으로 내일 꼭 만나자, 수. 

 

'산문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물거품  (0) 2022.10.25
  (0) 2022.10.21
담배  (0) 2022.10.21